지식 여행/세계의 사회 문화

독일의 이해 | 독일의 행정 구역과 도시

곰뚱 2020. 1. 4.

 

 

 

 

니더작센(Niedersachsen)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주인 니더작센은 독일의 남북과 동서를 잇는 주요 고속도로와 철도의 교차지점인 동시에 라인강과 엘베강 오더강의 교차점으로 동서와 서구를 잇는 내륙수로의 연결지점이다. 니더작센의 2/3는 농경지이다. 따라서 식품산업이 매우 발달해 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베이컨과 벌꿀이 유명하다. 하르츠(Harz)지역에는 광산업이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으며 중세 시대에는 도시 거슬라(Goslar)가 채광으로 부를 누리기도 했다.

 

 

1775년에 설립된 클라우스탈(Claustal)에 세워진 광산학교는 이제는 세계적인 공업대학으로 발전하였다. 하노버, 브라운슈바이크에 공과대학, 괴팅겐에 종합대학이 있다. 뤼네부르크(L neburg)는 소금으로 유명한데 칼리산업(칼슘, 염류를 이용한 산업)은 니더작센의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철, 갈탄, 칼륨, 석유, 암염 등의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근대적인 공업이 성행하고 있다. 주민은 77%가 프로테스탄트, 19%가 가톨릭신자이다. 하노버, 브라운슈바이크, 오스나브뤼크 등이 상공업의 중심지로 크게 발달하고 있으며, 철도, 도로, 운하 등이 연결되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 수도 : 하노버(Hannover)

중위산지(中位山地)와 북()독일평원의 경계에 있으며 라이네강 연변에 위치한다. 1235년 브라운슈바이크, 뤼네부르크공국주(1) 에서 비롯되어 14세기 자치도시로 한자동맹에 가담하여 경제적으로 번영하였으나 30년전쟁으로 타격을 받고 정치적 자립도 잃었다. 1692년 선제후령(選帝侯領)이 되었으며 그 뒤 하노버왕국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다음 세대인 게오르크 1세가 영국왕 조지 1세가 된 뒤부터 1837년까지 영국과의 동군연합(同君聯合)관계가 유지되기도 하였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 때에는 오스트리아에 가담하였고 66년 프로이센에 병합되어 독립국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그 뒤 1945년까지 프로이센의 지방행정도시로 발전하였으며, 독일연방공화국이 성립되자 올덴부르크, 브라운슈바이크와 함께 니더작센주로 구성되었다. 기계, 자동차, 고무, 사무용품, 식품 등의 공업이 활발하며 은행, 보험업무도 행해진다. 남쪽 교외에는 커다란 견본시장(見本市場)이 있으며 1947년 이후 매년 공업견본시가 열리고 있다.

 

석회암, 칼리염, 석유 등의 천연자원이 풍부하며, 교통의 요지로서 루르지방과 베를린, 함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를 잇는 간선도로가 교차한다. 주도로서 주와 연방의 기관, 경제단체, 종교단체의 본부 및 케스트너박물관, 공과대학, 수의과대학 등 문화시설이 많다. 2차 세계대전 중에 큰 해를 입었지만 전후에 복구되었고 구()시청사, 마르크트교회, 라이네궁전 등 역사적 유적이 복원되었다. 시내에는 공원과 녹지가 많아 <녹색의 도시>라고도 한다.

 

주(1) 공국(, 大公 또는 公爵)의 칭호를 갖는 군주를 원수(元首)로 삼는 유럽의 작은 나라. 유럽 봉건 제후의 영지였던 통치지역에 붙여진 이름이다. 주위 강대국과의 외교적, 경제적, 전략적인 이유에 따라 정책적인 중립주권국가로서 존재한다. 리히텐슈타인공국, 룩셈부르크대공국, 모나코공국 등이 있다.

 

 

라인란트-팔츠(Rheinland-Pfalz)

기원전 3000-1800년의 신석기 시대에 라인강 주변의 넓은 지역에 켈트족과 게르만족이 살았다. 기원전 1세기에 로마 제국으로 합병되었고, 그 후 약 500년 동안 골 지방의 북동부 경계 지대를 형성하였다. 로마 시대에 마인츠, 트리어, 쾰른과 같은 도시들이 성립되었다. 5-9세기 동안 라인란트는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에 포함되었다가, 그 후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에 속했다. 843년에 이 왕국은 둘로 나누어졌는데, 라인란트는 게르만족 동프랑크 왕국의 서쪽 경계 지대가 된 것이다. 그 동안, 이 지역은 세속 정부나 교회 정부로 이루어진 여러 소독립 국가로 분할되었다.

 

 

이 가운데 제일 힘이 센 국가는 트리어, 쾰른, 마인츠의 대주교 관구들과 13세기부터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왕조가 지배한 라인팔츠였다. 16-17세기에 있었던 종교 개혁 가운데 신교파, 가톨릭파, 칼뱅파 사이에 마찰이 생겨 영토는 더욱 분할되었으며, 30년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라인란트의 정치적인 발전은 바이에른, 에스파냐, 오스트리아, 스웨덴, 프랑스 등의 나라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에 팔츠 지역은 프랑스와 정치, 문화적으로 매우 밀접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17971017일의 캄포 포르미오 조약에 따라 라인강 서쪽 영토는 프랑스로 합병되고, 소독립 국가들은 해체되었으며, 교회가 소유한 땅들은 세속화되었다.

 

1815년에 라인란트는 새로 세워진 독일 연방 정부의 일부분이 되었으며, 빈 의회는 이 지역을 프로이센, 바이에른, 헤센다름슈타트, 헤세나사우 등으로 분할하였다. 라인란트-팔츠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바이에른, 헤센, 프로이센 영토의 일부분이 모여 1946년 구성이된 주()이다. 전후 가장 가난한 주였던 이곳은 지금은 독일에서 최대의 수출량을 자랑하는 주가 되었다. 루드비히스하펜(Ludwigshafen)에는 세계적인 화학회사 바스프(BASF)의 본부가 있으며 마인츠에는 독일 최대의 TV, 라디오, 네트워크 업체인 체널2(ZDF)가 있다.

 

주요 도시로는 마인츠를 비롯하여 루트비히스하펜, 코블렌츠, 트리어, 카이저슬라우테른, 보름스, 피르마젠스, 노이슈타트안제어바인슈트라세 등이 있다. 주민의 대다수가 프랑크족의 후손들이며, 라인란트의 기구한 역사로 인하여 고대 로마인인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의 혈통이 섞인 복합적인 사회 구조를 지녔다. 이 지역으로 이민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탈리아, 프랑스, 터키, 에스파냐,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출신의 외국 노동자들이며, 이들은 주위에 있는 독일의 여러 주를 거쳐 이 곳으로 온 것이다.

 

수도 : 마인츠(Mainz)

독일에서 가장 오래 된 도시의 하나로서 로마 시대에 건설되었다. 이 곳이 원래는 모고 신을 숭배하는 켈트족의 거주지였는데, 기원전 14세기에서 9세기경에 로마인들이 들어와 이 곳에 군사 야영지를 세웠다. 그리고 켈트족이 숭배하던 신의 이름을 따서 이 곳의 이름을 모군티아쿰이라고 불렀다. 군의 야영지에 불과하던 이 곳은 그 후 인구가 늘어나고, 영역이 확대되어 기원전 13년에는 로마의 드루수스가 성채를 건설하는 등 많은 발전을 거듭했다. 451년경 로마인들이 이 곳을 떠난 후에는 게르마니아 수도원의 중심지가 되었고, 6세기경에는 시가지가 생겼으며, '독일인의 사도'라고 불린 보니파티우스의 노력으로 747년에는 이 곳에 대주교구청이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마인츠 대주교는 1000년경부터 왕의 대관권을 가지는 막강한 세력을 갖게 되었다. 대주교란 천주교에서 관할 구역을 주관하는 일 자체를 말하거나 또는 그 일을 맡은 사람을 가리킨다. 대관권이란 왕이 즉위를 공포하기 위하여 왕관을 쓰는 의식을 행할 때 이의 진행을 맡는 권리를 말한다. 이 대주교구청은 1802년까지 이 곳에 있었다. 급속도의 발전을 보인 이 마인츠 지역은 1118년에 이르러서는 국가로부터 지방 자치단체의 지배권을 어느 정도 인정받아, 자치권을 얻게 되었다. 1244년부터는 교황이나 왕의 지배에 속하지 않고 정치적,군사적으로 독립하여 자유 도시가 되었고, 1254년에는 라인 지방 도시 동맹의 강력한 중심지가 되어 '마인츠 황금 지대'로 불리었다.

 

1356년부터는 이 곳의 대주교들이 신성 로마 제국의 재상이 되고, 제후를 뽑을 권리를 갖게까지 되었다. 인쇄술을 발명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도 1400년경에 이 곳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1440년경부터 인쇄 일을 하기 시작하여 1450년경 활자에 의한 인쇄 기술을 발명하였으며, 인쇄 공장을 운영하여, 마인츠는 인쇄술의 중심지로서의 명성 또한 얻게 되었다. 그러나 1462년에 이르러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두 대주교가 전쟁을 일으켜, 경제가 극도로 침체되자 이 곳 시민들은 자치권을 박탈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많은 인쇄 기술자들이 정처없이 이 도시를 떠나게 되었고, 이들은 다른 지역으로 가서 인쇄술을 널리 퍼뜨리게 되었다. 이 마인츠는 30년 전쟁 중에는 스웨덴과 프랑스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30년 전쟁이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 전쟁으로, 처음에 보헤미아의 신교도가 일으킨 반란에서 비롯되었는데, 점차 스웨덴, 덴마크, 프랑스 등이 참가하여 국제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오랫동안 전쟁터였던 독일은 그 피해가 막심하였으며, 경제적으로도 뒤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상업 및 문화의 중심지로서 활발한 발전을 보였다. 그러다가 1793년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이 곳을 다른 나라의 지배로부터 되찾았으나 또 다시 1797년에 맺어진 캄포 포르미오 조약과 1801년에 체결된 루네빌 조약에 의해 이 마인츠는 프랑스 소속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 이후에 대주교관구가 주교관구로 격하되고, 교회의 영토가 종교와 분리되는 등 수난을 겪다가,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된 1816년부터 헤센다름슈타트로 넘어가 새로 생긴 라인헤센이라는 주의 주도가 되었다. 그 이후 마인츠는 1918년까지 독일 연맹과 독일 제국의 국방상 중요한 지점의 하나가 되었다. 1차 및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잠시 프랑스의 군대가 점령하기도 했는데, 2차 세계 대전 때에는 도시의 80% 정도까지 파괴되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바덴-뷔르템베르크(Baden-Würrttemberg)

바덴-뷔르템베르크는 아름다운 전원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흑림지대(Schwarzwald)는 숲이 우거진 산악지대로 인기있는 휴양지이다. 한국에는 88올림픽 개최지 발표를 바덴바덴에서 했기 때문에 베를린, 뮌헨, 프랑크푸르트 다음으로 유명해졌던 도시가 바덴바덴이다. 아름다운 보덴제, 라인강, 도나우강, 네카강의 푸르른 강안, 슈웨비쉬 알프스 고지는 유명한 관광지이다. 특히 라인 강변과 보덴제 강변의 다양한 지형과 온화한 기후는 과일, 포도, 아스파라거스 및 담배 재배에 이상적인 환경을 마련해 주고 있다.

 

 

바덴-위르템베르크의 위치는 교통에 편리하여 관광 및 산업의 요지로서의 장점을 더욱 강화 시켜주고 있다. 또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주민들은 뛰어난 창의력과 사업감각을 지니고 있어서 독일 문화 및 정신사의 여러 장을 장식한 바 있다. 이곳에서 출생한 시인 쉴러(F.Schiller)와 횔더린(F.Holderlin) , 그리고 철학자 헤겔과 하이데거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수도 슈투트가트가 위치한 네카강 중부지역은 바덴-위르템투르크 주의 산업 및 문화의 중심지이다. 만하임(Mannheim)의 예술홀과 라이츠 박물관 그리고 오랜 전통의 극장은 예술팬들을 열광시키고 있다.

 

울름(Ulm)과 후라이부르크(Freiburg)의 성당은 남부 독일 건축양식의 기념비이다. 하이델베르크의 성과 옛 도시의 중심가는 전세계 관광객들을 매료시키고 있으며 흑림지대의 전통적인 뻐꾸기 시계는 이제 세계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이 지역은 독일을 대표하는 산업지역이라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오랜 수공업의 전통과 현대적인 기업정신이 바덴-뷔르템부르크 산업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바덴-뷔르템부르크는 고도로 산업화되어 있으며 독일의 연방주 가운데에서도 경제면에서 최강의 수준을 자랑한다. 뻐꾸기 시계의 생산전통에서부터 유래한 흑림지대의 정밀공업과 자동차산업은 가장 유서깊은전통 산업이다. 특히 슈트트가르트와 그 인근에는 Benz, Bosch, Prsche등 독일기업과 IBM등 국제적인 기업들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대기업 못지않게 기술력을 자랑하는 중소기업들이 곳곳에 존재한다.

 

벤츠와 포르쉐는 이 지역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하였으며 지금도 이 공장과 본사를 방문하려는 공학도로 붐빈다. 칼스루예의 핵연구센터, 하이델베르그의 암연구센터, 막스-프랑크 연구소등이 있다. 그리고 9개 종합 대학교, 39개의 전문대학, 거의 130개의 각종 연구소와 특히 프랑크푸르트와 가까운 하이델베르그는 1386년에 설립된 독일에서는 가장 오래된 종합대학으로 "황태자의 첫사랑"으로 더욱 유명해 졌으며 이 대학의 학생감옥도 매우 유명하다. 특히 부근의 철학자의 길은 이곳을 방문한 사람이면 한 번은 걸어가보는 길이되었다. 칼스루예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공과대학이 있으며 또한 독일 최고의 사법기관인 연방법원과 연방헌법재판소가 있다.

 

수도 : 슈투트가르트(Stuttgart)

네카어 강을 끼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슈바벤의 숲이 우거진 포도원과 과수원 조성지에 있다. 서부로 슈바르츠발트 산림지대와 남부로 슈바벤쥐라 산맥 사이에 있다. 선사시대에 정착지가 있었고, 교외지역인 바트칸슈타트에는 로마 요새가 있었지만, 슈투트가르트 자체는 950년경 세워진 종마 사육장에서 생겨났다. 포도주산업이 발달했으며, 13세기에 뷔르템베르크 백작가에 넘어간 후 도시권을 받았다. 1320년경 백작가의 주요거주지가 되었으며, 1482년 이후 계속해서 뷔르템베르크 백작령·공작령·왕국·주의 수도였다. 16세기에 이루어진 번영은 30년전쟁(1618~48)과 프랑스 루이 14(1681~84)의 침입으로 인해 쇠퇴로 이어졌고, 19세기에 산업혁명이 급속한 신장을 일으키고 나서야 회복되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도심지는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브레멘(Freie Hansestadt Bremem)

브레멘과 브레멘하벤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 브레멘주는 두 도시가 서로 65Km정도 떨어져 있다. 브레멘은 인구, 면적면에서 가장 작은 주이다. 브레멘은 바이에른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정치단위이고 이태리에 있는 산 마리노 다음으로 역사가 깊은 도시 공화국이다. 787년에 주교 관할구역으로 설립된 브레멘은 브레멘 시장(市場)의 특권을 부여받은 덕분에 빠른 성장을 이룩하였다. 11세기에는 "북부의 로마"로 불리웠다.

 

 

1358년 브레멘은 16세기까지 북해와 발트해 연안의 무역을 장악했던 한자동맹에 가입하였다. 브레멘하벤은 브레멘이 웨이제강이 범람하여 브레멘이 모래로 뒤덮일 위기에 처해 있었을 때 시장(市長) 슈미트가 웨이제 강 어귀에 새로운 항구를 건설한 것을 시초로 성장한 도시이다. 브레멘하벤의 물자는 대부분 컨테이너로 취급이 되며 1983년에는 시계최대의 컨테이너 터미널이 세워지기도 했다. 브레멘은 그림형제의 동화인 "마을의 악대"는 시의 상징이기도 하다. 브레멘하벤에는 독일 해양박물관이 위치해 있으며 고대에서 부터 현대까지 독일 해상선박의 모델을 볼 수 있다. 유명한 U-Boat가 해상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매년 2월의 둘째 금요일에는 선박회사와 해운업자들의 전통적인 저녁식사 모임에는 독일의 주요 명사들이 시청으로 초대된다.

 

수도 : 브레멘(Bremem)

브레멘 주의 중심이 되는 브레멘 시는 일찍이 베저강 우안에 자리잡은 브레메 또는 브레문이라 불렸던 초기 취락은 라인 강에서 엘베강으로 이어진 교역로와 북해에서 독일 남부로 이어진 교역로가 교차하는 유리한 지점에 자리잡고 있었다. 787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샤를마뉴가 브레멘 교구를 설립했는데, 이곳은 유럽 북부 전역을 포괄하는 전도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845년에 이 주교관구는 대주교관구가 되었다. 965년에 관세권과 화폐주조권을 포함한 시장권이 주어지면서 상업활동이 증대되었고, 곧 이 신흥도시는 독일 북부의 주도적인 종교, 경제 중심지에 속하게 되었다.

 

1358년 신흥도시 상인 계급들의 경제적, 정치적 연합인 한자 동맹에 가입한 후 이곳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베저강 양변에 견고하게 요새화된 위치를 차지하고 제국자유도시로 알려지게 된 브레멘은 '30년전쟁'(1618~48)에서 독립을 지켰고, 뒷날 스웨덴인, 하노버인들의 침공을 물리쳤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자치공화국으로서 1815년 독일연방에, 1817년 재편성된 독일제국에 합류했다. 항만시설의 확장 및 제조업 발달과 1888년의 독일관세동맹(Zol- lverein) 가입으로, 세계 교역·운송의 선두자로서 경제적 중요성을 얻었다.

 

20세기 후반의 브레멘 시에는 중세와 현대 건축이 흥미롭게 혼합되어 있다. 이 시의 심장부로 복구된 옛 도시의 두드러진 특징들로는 11세기 성당이 있는 유명한 시장터, 르네상스식 건물 정면을 가진 고딕식 시청, 시장권과 제국의 사법권을 상징하는 롤란트 상(1404), 그림같이 아름답게 줄지어 있는 박공으로 만든 옛 주택들, 현대식 의회 등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주택의 69가 파괴되는 심한 폭격을 받았지만 넓은 공원과 늘어나는 교통량을 수용할 수 있도록 복구되었다. 1957~62년에 이 시의 중심부로부터 4.8정도 떨어진 곳에 건설된 현대적 위성도시 노이에바르는 확장되고 있는 시와 합체를 이루며, 원형으로 시를 둘러싼 주변 주거지들 중의 하나이다.

 

 

브란덴부르그(Brandenburg)

다른 연방주들과 비교해 브란덴부르크는 인구가 적다. 그러한 이유로 17-18세기에는 이 지역을 개발하고자 지배자들은 외국인에게 많이 개방하였다. 개신교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이민자까지 국경을 개방하였다. 아직도 포츠담에는 "네덜란드구역" "프랑스교회"등이 그 자취를 말해주고 있다. 하벨강과 슈페레강은 구릉에 있는 시골을 흘러간다. 수많은 자연공원, 경관보호구, 생물서식권 지구의 보존이 잘 되어 있다. 농경과 삼림이 이 주의 경계인 오더 강의 주요 부분이다.

 

 

삼림 지역에서는 호밀, , 감자, 사탕무가 생산되고, 베를린 주변과 프랑크푸르트 주변에는 과일과 채소가 난다. 아이젠휘텐슈타트와 코트부스 중심의 산업 지대는 "동부 발전" 프로그램에 의해 120개의 주요 투자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농림과 산림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체 지역의 35%가 전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의 호밀과 감자, 사탕무우가 재배되고 베를린 주변과 오데르강의 프랑크푸르트 주변에는 과일 채소가 생산된다. 또한 갈탄의 주생산지대로 화학과 에너지 산업의 기반이다.

 

주의 노동인구 가운데 25%정도가 벤츠회사의 화물차 조립공장에 종사하고 있다. 오데르강가의 프랑크푸르트는 전자공학과 게계제조공업으로 유명하다. 오데르강가 프랑크푸르트의 비아드리나 대학교는 1991년 유럽 대학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여기서는 가르치고 연구하는데 있어서 폴란드-독일 협력이 특별히 강조된다.

 

수도 : 포츠담(Potsdam)

베를린의 남서쪽 경계와 맞닿아 있고, 하펠강의 지류인 누테강 연안에 있다. 이 도시는 993년에 포츠투피미라는 이름의 슬라브족 주거지로 처음 문헌에 등장했고, 1317년에 자치시로 인가받았다. 1640년에는 프리드리히 빌헬름(브란덴부르크 대선제후)이 이곳에 별장을 지었으며, 프리드리히 대왕(1740-86 재위) 시절에는 프로이센의 학문과 군사 중심지이자 사실상의 수도였다.

 

18세기에 이 도시의 네덜란드 이주민 거주 구역을 비롯한 일부 지역은 네덜란드의 분위기를 짙게 풍겼다. 2차 세계대전 때 큰 피해를 입었지만, 역사적 가치를 지닌 중요한 건물들은 대부분 그대로 보존되거나 복구되었다. 체칠리엔호프 궁전은 연합국 지도자들(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 영국의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 소련의 요셉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이 포츠담 회담(1945. 7. 17-8. 2)을 열었던 곳이다.

 

 

작센(Freistaat Sachsen)

라틴어명 삭소니아(Saxonia), 영어명 색서니(Saxony). 독일 북부에는 옛날부터 서게르만의 작센족이 거주했는데 8세기 말 카를대제(Karlder Grosse)가 정복하여 프랑크왕국의 일부가 되었고 그리스도교화했다. 9세기 후반에 강대한 작센부족공국이 형성되었지만, 1180년 하인리히사자공(獅子公)의 실각으로 와해되었다. 그 영지의 일부와 작센공위를 계승한 아스카니어가(, 1356選帝侯位를 취득)1423년 단절되어 작센의 범위가 축소되고 마이센변경(邊境) 백작의 베틴가()가 그 영지와 선제후위를 얻었다. 그 뒤 베틴가의 지배지역인 엘베강 상류지역이 작센이라 불리게 되었다. 베틴가는 1485년 에른스트계와 알브레히트계로 갈라졌으며, 에른스트계가 선제후위를 상속하였고 종교개혁시대에는 루터를 비호한 프레드리히 3세가 나와 신교파 제후의 리더가 되었다.

 

 

그러나 슈말칼덴전쟁에서 패배하여 선제후위와 영지의 일부는 알브레히트로 넘어가고 그 뒤 알브레히트계가 작센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시대에 절대주의적 통치기구가 정비되어 학예가 융성하였으며 아울러 섬유공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도 발전하였고 그 위에 작센 선제후는 폴란드왕까지 겸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수도 드레스덴은 바로크풍의 화려한 도시가 되었으나 폴란드왕을 겸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북방전쟁(1700-21)에 말려들었으며, 7년전쟁(1756-63)에서는 오스트리아측에 가세했다가 크게 타격을 받았다. 1806년에는 나폴레옹 지도하의 라인동맹에 가입하고, 나폴레옹으로부터 왕국으로 이름 붙이는 것을 허락받았으나, 빈회의(1814-15)에서 그 영토의 절반 이상을 프로이센에게 할양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7월혁명(1830)의 영향으로 폭동이 일어나 1831년에 헌법을 발포했지만, 48년 독일에서 일어난 3월혁명 이후는 반동적 정치로 기울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에서는 오스트리아측에 가세했다가 패하였고, 66년 북독일연방에 가맹, 이후 독일제국, 이어서 바이마르공화국으로 계승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19년에 왕제가 폐지되었고, 나치스 지배하의 독일의 1개 주가 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켐니츠(Chemnitz)에서는 공과대학 연구소를 기반으로 기계공학이 발전하였으며 마이크로 전자공학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츠위카우(Zwickau)에서는 구 동독의 자동차 트라비 대신에 포크스바겐의 자동차가 생산되고 있으며 아직도 중요한 자동차 생산기지이다. 라이프찌히는 과거에는 출판산업의 요지였으나 현재는 박람회 도시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알프스와 같은 경치를 가진 이곳은 관광산업을 육성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수도 : 드렌스덴

19세기 후반에 싹 터 제2차 세계대전 뒤에 발전, 카메라, 텔레비전, X선촬영장치 등의 정밀광학기계 외에 전통적 담배 및 식품공업(특히 맥주양조)이 발달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 중, 특히 19452월의 대공습으로 도심부는 파괴되었으나, 전후 옛 거리의 특색을 살리는 데 힘써 츠빙거궁전을 비롯한 교회, 왕성(王城) 등 옛 모습이 그대로 복구되었다. 독일 최대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인 츠빙거궁전은 그 내부가 미술관, 박물관으로 되어 있으며, 라파엘로의 시스티나의 성모는 그 대표적 소장 작품이다. 공 업종합대학 및 조형미술, 음악, 육군대학 등 고등교육기관도 많다.

 

마이센 변경백령(邊境 伯領)인 슬라브인 취락 부근에서 일어나, 13세기에 도시가 되고 15세기에 재판권, 지정시장권을 얻 어냈다. 당시 인구는 약 4000명 이었다. 1485년의 분할로 알베르트계() 베티나가령(家領)에 속하고, 16세기 후반 작센 선제후국( 選帝侯國)의 수도로서 번영했다. 엘베강 좌안의 구()시가는 네덜란드풍으로 돌의 누벽과 구릉형 보루로 둘러싸여 미술공예의 중심지가 되었다. 30년전쟁 뒤에는 바로크문화가 100년 이상 꽃핀 황금시대로서, 츠빙거궁전, 아우구스트다리, 그로사가로덴(대공원)을 비롯하여 엘베강 오 른쪽 연안의 신()시가가 만들어지고 인구 약 5만에 이르렀으며, 미술공예품과 도자기 수집으로 이름나서 <엘베강변의 피렌체>라 불렸다 . 7년전쟁, 나폴레옹전쟁으로 피해를 받았으나 부흥하였고, 19세기에는 철도의 교차점으로 각종 공업이 발달하였다. 외국인 거주자가 많 으며, 강변의 테라스는 <유럽의 발코니>라 불렸다.

 

 

작센 안할트(Sachsen Anhalt)

1947년 종전의 프러시아지방이던 작센과 안할트주 및 브라운슈바이크지역, 튀링겐지역이 합쳐서 이루어졌다. 49년 동독의 1개 주가 되었다가 52년 할레와 마크데부르크의 2개 주 로 나뉘었다. 9010월 독일이 통일되면서 다시 1개 주로 합쳐졌다. 북쪽의 마크데부르크 부근은 비옥한 농업지대로 기계화된 농업이 발달 하여 밀, 사탕무, 호밀, 아마, 홉 등의 농산물이 생산된다. 제당업이 활발하고 화학공업의 중심지이다.

 

 

남쪽지역은 광물이 많아 할레, 마크데부르크, 바이센펠스등의 공업도시가 발달하였다. 종교개혁의 발상지인 비텐베르크가 이 주에 있으며 주민 가운데 루터 파 그리스도교도가 많다. 이주는 인구밀도가 아주 낮다. 북부지역에는 사탕무우, , 채소가 재배된다. 설탕공장을 비록한 식품공업이 발 전해 있다. 과거에는 화학과 갈탄 공업의 중심지였던 도시들이 동독의 잘못된 정책으로 힘겨운 산업개편 작업중이다. 오염된 자연환경을 복원하고자 노력중이다.

 

수도 : 마크데부르크(Magdeburg)

805년 슬라브 지역과의 경계에 있는 작은 교역마을로 처음 알려졌고, 937년경에 오토 1세가 여기에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장크트페터-모리츠-이노첸츠 수도원을 설립한 시기에 중요해졌다. 962년 대주교관구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이 대주교관구의 경계는 968년에 하펠베르크, 브란덴부르크, 메르제부르크, 마이센, 차이츠나움부르크 등의 주교관구를 포함하는 선에서 결정되었다. 이 대주교관구는 게르만족이 엘베 강 동쪽의 슬라브 지역을 식민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1188년 화재로 파괴되었지만 13세기에 상업 중심지로 번창하여 한자 동맹의 주요도시가 되었다.

 

또한 13세기에 ' 마크데부르크 법'(Magdeburger Recht)으로 알려진 자치도시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나중에 동유럽 전체에 널리 채택되기도 했다. 이곳 주민들은 대주교와 거의 끊임없이 충돌했으며, 15세기 말에는 거의 자치를 이루었으나, 끝내 제국도시는 되지 못한 채 호엔촐레른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 1세에게 점령되고, 그 뒤 1813년까지 베스트팔렌왕국령이 되었다. 1816년에는 프로이센왕국의 프로인츠작센(뒷날 작센안하르트)의 중심도시가 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 전에는 군수공업도시로 번영하였다. 오늘날에는 중요한 공업도시로서 기계, 화학, 섬유, 제당 등 각종 공업이 발달해 있다. 오토 폰 귀리케가 마크데부르크 반구를 이용하여 기압의 영향을 측정한 곳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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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Freie und Hansestadt Hamburg)

독일의 16개주 가운데 3번째로 작은 주이다. 825년 무렵 구축된 하마부르크성이 이 시의 기원으로, 834년 대주교좌로 승격되면서 북유럽 그리스도 교화 기지가 되었다. 12세기 영주 샤벤부르크백작은 이곳에 상인을 정주시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1189년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상업, 관세, 항행에 특권을 부여하였으며 1241년 뤼벡과 방위조약을 맺어 독일 한자동맹의 기초를 굳히고, 그 뒤 300여 년에 걸쳐 한자동맹의 동서무역 중계지로 발전, 노르웨이,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과 관계를 맺어 왔다.

 

 

북유럽 제1 무역항으로 발전하였으나, 1806년 프랑스군에 점령되고 10년 프랑스령에 편입되었다. 독일 해방전쟁 뒤 1815년 자유도시로서 독일연방의 일원이 되었으며, 중남미, 아프리카, 동아시아와 북유럽을 연결하는 중계항이 되었다. 현재 세계의 약 1100개 항구와 260개 항로의 정기항로가 연결되는 중요한 항구로, 항만지구 총면적이 76에 이르며 그 가운데 16가 자유항이다. 독일에서 베를린에 이어 인구가 많은 도시이며,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붐비는 항구 중의 하나이다. 하나의 도시로 한 주를 이루는 함부르크의 위치는 자치독립의 오랜 전통을 반영한다.

 

사실 함부르크와 브레멘은 독일 유일의 도시국가로 아직도 중세의 자치도시적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함부르크가 갖고 있는 이러한 개별성을 주민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공공생활이나 개인생활의 여러 면에서 도시문화가 전반적으로 표준화되는 경향에 휩쓸리지 않고 있다. 비교적 외국인이 적게 살고 있지만 통과객은 많고,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고 있어 세계에서 뉴욕 다음으로 많은 영사관이 설치되어 있다. 조선과 무역이 수세기 동안 경제의 원천이었기 때문에 항구가 가장 중요한 이곳의 특성이다.

 

함부르크의 다른 특성으로는 암스테르담을 연상시키는 운하망, 호수, 공원, 우아한 주택으로 가득한 전원교외, 격조 높은 쇼핑 아케이드, 소장품이 풍부한 박물관, 활기찬 문화생활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이런 조건에 힘입어 관광산업이 발전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중에 도시가 심하게 파괴되었는데도 번성하는 상업과 더불어 계속 우아한 예전의 모습을 간직해오고 있다.

 

수도 : 함부르크(Hamburg)

함부르크는 독일에서 두번째로 큰 산업도시이며 인구 300만 이상의 경제권 중심 도시이다. 그럼에도 광대한 공원과 가로수길, 농경지등 독일의 "가장 푸른 도시"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함부르크는 독일의 가장 중요한 항구이자 해외무역 및 교통의 중심지이다. 항구의 산업지역에는 조선소, 정유소, 그리고 해외로부터 수입된 원료의 가공처리 공장이 함께 있다. 함부르크는 1189년 관세 및 경제특권을 부여받으며 부역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 후 한자동맹의 첫 구성원의 하나로 북해와 발트해 사이의 중요한 화물항으로 성장하였다. 1460, 1510년 제국도시로 승격되어 그 자치권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1842년 화재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세의 대무역 도시라는 과거의 흔적은 대부분 소실되어 현대적인 모습을 많이 가지고 이있다. 함부르크는 독일 최초로 상설 오페라 하우스가 세워졌으며 헨델(1685~1759)에 그의 첫 작품인 "알미라"를 이곳 무대에 올렸다. 브람스는 함부르크 출신이다. 베버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위해서 특별히 세운 극장 "신 플로라"가 세워지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함부르크는 뮤지컬 공연으로 유명하다. 프랑스와 영국의 영향으로 함부르크는 독일 계몽주의의 요람이었다. 1767년 독일 국립극장이 여기에 설립되었으며, 이 기관은 고트프리트 에프라임 레싱(1767-1769)의 이름과 관련되어 있고("함부르크 희곡론:Hambugischer Dramturgie"), 특히 세익스피어 작품 공연을 그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민나 폰 바른하임"(레싱)"돈 카를로스"(실러)는 여기서 초연되었다. 프레드릭 고트리프 클로프슈토크(1724-1803)와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1740-1815)가 당시의 함부르크의 "문학 기관"이었다.

 

19세기의 반동 시대에는 함부르크의 율리우스 캄페가 하인리히 하이네의 작품과 "젊은 독일"의 다른 "민중 선동적인" 작가들 작품을 출판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에 미군이 입성하자 미군사이에서 인스턴트 식사방법이었던 빵 사이에 햄을 끼워 먹는 방식이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 유행하였다. Hamburg의 영어식 발음이 햄버그였으므로 그 음식을 햄버그라고 불렀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전세계적으로 유행을 하게 된 것이다.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Nordrhein-Westfalen)

고대 작센족은 베스트팔렌, 엥게른, 오스트팔렌 등 3개의 주요집단으로 나누어졌다. 700년경 엠스강과 훈데강 유역에서 살고 있던 베스트팔렌인들은 남쪽으로 쾰른까지 영토를 넓혀나갔으며, 775년에는 샤를마뉴가 이끌던 프랑크족의 침입에 대항했다. 보다 강력하게 결성된 혈통의 공국이 생겼는데도 약 3세기 동안 이 지역은 독립된 자치권을 갖고 있었다. 12세기에 들어와 오랫동안 유지되어오던 베스트팔렌인과 엥게른인 사이의 구분이 없어졌으며, 베저강 서쪽에 있던 모든 작센족 영토를 베스트팔렌이라 부르게 되었다.

 

 

1180년 쾰른 대주교들은 이곳을 속령으로 받았으나, 실제 속령의 영토는 주로 쾰른 바로 북쪽까지로 한정되었다. 다른 정치적 집단이 이곳에 많이 생겨났는데, 그중에는 뮌스터, 파더보른, 오스나브뤼크, 민덴 주교관구, 발데크, 샤움부르크, 리페, 라펜스베르크, 마르크(림부르크 포함) 백작령, 도르트문트 제국도시, 에센 수도원 등이 포함된다. 1512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니더라인베스트팔렌이 형성되었다. 17세기초부터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가() 통치자들이 베스트팔렌 영토를 차지했는데, 이들은 1803년 파더보른과 뮌스터의 대부분 지역을 획득하면서 주도세력이 되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점령한 시기부터 출발을 한다. 프로이센에 속해있었던 라인지역 가운데 많은 부분과 베스트팔렌 지역 그리고 리페-데드몰트(Lippe-Detmold)주가 1946년 통합되어 오늘날의 노르트란트-베스트팔렌이 되었다. 독일연방주 가운데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으며 유럽최고의 인구 밀집지역이다. 루르(Ruhr)지역은 유럽최고의 산업지역이다.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공업지대인 라인-루르 지역이 이 주의 중부에 걸쳐 있고 경제와 문화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풍부한 천연자원이 있어 매우 다양한 신흥공업을 뒷받침한다. 과거에 석탄과 철강을 기반으로한 경제구조를 세계시장의 수요에 맞추어 혁신적인 산업을 유치하여 세계시장의 수용에 맞추어 재편하는데 성공을 하였다. 현재 세계최대의 엔진 제조업체를 비롯한 유명한 외국가업들이 몰려 있다. 그리고 수십만개의 중소기업들이 몰려 있다. 도르트문트는 독일 최대의 양조지역이다. 뮌스터에는 대학이 있으며 통일 전까지 독일연방공화국의 수도였던 본, 대성당으로 유명한 쾰른이 세계 최대의 내륙항구인 뒤스부르크가 이 지역에 속해 있다. 그리고 수십 개의 발전소를 가진 독일 에너지 생산의 핵심기지이기도 하다.

 

 수도 : 뒤셀도르프(Düsseldorf)

라인 강 오른쪽에 있으며 루르 공업지대의 중심지이다. 1159년에 처음으로 뒤셀도르프(라인 강의 작은 지류인 '뒤셀 강변의 마을'이란 뜻)라는 이름이 알려졌고 1288년 베르크 백작에게 인가를 받았다. 1511-1609년 팔츠노이베르크로 넘어갈 때까지는 베르크공국(公國)과 윌리히공국(公國)의 수도였다. 뒤셀도르프는 30년전쟁과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때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선제후(選帝侯)인 팔라틴(palatine : 자기 영토 내에서 왕권의 일부 행사를 허가받은 영주) 요한 빌헬름 2세가 통치하면서 다시 부흥했다.

 

1805-13년 나폴레옹 시대에 베르크 대공국의 수도였다가 1815년 프로이센으로 넘어갔다. 1870년대 철강산업이 자리잡은 뒤로는 상업과 경제가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유럽 공업지역의 선두주자의 하나로서 이 지역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거대한 루르 역청탄전 때문이다. 이 탄전은 대체로 루르강과 리페강 사이에 있으며, 라인 강 서쪽에서 동쪽으로 뮌스터, 아른스베르크 구까지 뻗어 있다. 도로, 철도, 내륙수로망이 밀집해 있어 라인-루르 공업지대를 뒷받침하는데, 이 공업지대에서는 주로 제철, 제강, 화학제품, 기계공업이 이루어진다.

 

 

멕클렌부르크-포어퍼메른(Mecklenburg-Vorpommern)

독일에서 농업이 가장 우세하고 인구밀도가 가장 낮다. 이 주는 파괴되지 않은 자연유산, 수 천개에 달하는 호수가 매력적이다. 발트해 연안의 도시들은 수 세기전부터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과 무역을 통해 결속되어 있었다. 한자동맹의 도시 로스토크(Rostock)는 인구가 약 25만 정도로 멕클렌부르크-포어퍼메른주의 최대 도시이다. 통일 이후에 주의 수도가 슈베린으로 정해졌다. 이 주는 역사상의 메클렌부르크 지역에 해당하며, 1990년 통독 직전에 동독의 로스토크, 슈베린, 노이브란덴부르크 주의 대부분을 합쳐서 재창설되었다.

 

 

구 동독 영토의 1/5을 차지하며, 최북단에 해당한다. 완만한 구릉지역과 농경지 그리고 숲, 목초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가장 큰 호수가 뮈리츠 호수(117km²)인데 그 동부 해안지역은 자연보호구역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주는 관광산업을 육성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며 자연환경도 함께 보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농업이 가장 중요한 경제활동이다. 주요작물은 호밀, , 사탕무우, 감자, 건초 등이며 옥수수, 완두콩, 평지, , 아마를 집중 재배하는 곳들도 조금 있다. 목초지에서는 양, , 말이 사육되며, 내륙의 호수들에서는 어로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수도 : 슈베린(Schwerin)

슈베린호()에 면하여 있는 도시로 농업 및 낙농업이 발달하였다. 원래 벤드족()의 거주지였으며, 1161년 사자공 하인리히(Heinrich der Löwe)으로부터 시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았으며 그후 곧 주교 관구가 되었다. 1358년 메클렌부르크에 귀속되었으며 17세기 초에 메클렌부르크슈베린주()의 주도가 되었다. 30년전쟁(1618-1648) 때는 알브레흐트 폰 발렌슈타인(Albrecht von Wallenstein)이 지휘하는 제국군이 점령하였다(1624-1631).

 

베스트팔렌조약(1648)에 의하여 주교 관구가 세속화되어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국의 일부가 되었다. 1934년 메클렌부르크주의 주도가 되었으며 1952년부터 1990년까지는 동독의 중심 도시였다. 1990년 독일통일이 이루어지면서 이전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이 지역의 상공업 및 교통의 중심지로 화학, 제약, 목재, 농업기기, 플라스틱, 케이블, 크레인, 도자기, 담배 등의 제조업이 활발하다. 주요 건축물로는 14-15세기에 건립된 고딕식의 신교 교회와 19세기 때 공작령()으로 슈베린호의 섬 위에 세워진 궁전 등이 있다.

 

 

바이에른(Freistaat Bayern)

독일에서 가장 큰 주이며 독일의 남동부 전체로 이루어져 있다. 영어로는 "바바리아"로 불리운다. 서쪽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와 헤센 주, 동쪽은 체크, 남쪽과 남동쪽은 오스트리아와 접한다. 바이에른은 따로 도시 이름이 없이 해당 지역 전체를 말한다. 바이에른은 자기 고유의 국가(國歌)도 있고 독특한 방언을 말한다. 많은 나라에서 "바이에른인""전형적인 독일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다른 지역의 독일인에게도 배타성이 강하고 자주성이 강하다.

 

 

6세기경 바이에른 공작이 이 지역을 다스리면서 역사가 시직된 바이에른은 "바이에른 자유주"라는 이름은 바이에른이 전통적으로 군주 중심의 이기보다는 공화주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바이에른은 오랜 역사가 말해주듯이 풍부한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에는 관광천국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알프스 산악지대, 호수들, 독일 최초의 국립공원 바이에른 숲, 도나우강과 마인강 및 그 지류들이 흐르는 계곡과 "로만틱 가도"변의 아름다운 풍경과 도시들을 볼 수 있다.

 

독일의 최대의 농업 중심지였던 바이에른의 수도 뮌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자동차, 항공기, 전기 및 전자산업, 보험, 출판등의 산업을 발전 시켰으며 뮌헨은 막스-플랑크 연구소와 핵연구용 원자로를 갖춘 학문연구의 중심지이며 1992년에 새롭게 완공된 공항과 함께 국제항공 교통의 요지로 꼽힌다. 뉘른베르크(Nurnberg)는 나폴리에서 스록홀름, 그리고 리스본에서 프라하를 경유하여 바르샤바를 연결하는 미래의 유럽 고속도로 교차로에 위치해 있다. 뉘른베르크의 주요산업으로는 기계제조, 전자 산업 및 장난감 산업을 들 수 있다.

 

뉘른베르크에서 매년 열리는 국제 장난감 전문 무역박람회는 이 분야에서 가장 권위있는 박람회로 알려져 있다. 아우그스부르크(Augsburg)는 기계제조와 섬유산업의 본고장이다. 레겐스부르크(Regensburg)는 새로이 전자산업을 발전시키고 있으며 최근 들어서는 자동차산업에 역점을 두고 있다. 잉골슈타트(Ingolstadt)에도 자동차 생산공장이 있다 또한 바이에른 동부의 유리 공장과 세라믹 공장은 오랜 수공업 산업의 전통을 이어받아 현재 최고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바이에른의 많은 지역, 특히 알프스와 그 기슭에 자리잡은 구릉지대에서는 농업산업이 여전히 중요성을 띄고 있다. 이 지역의 포도주 생산은 국제적인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바이에른에는 수백 개의 유명 맥주 양조장이 있어서 뮌헨의 10월 축제 등의 여러 행사에 맥주를 대량으로 공급하고 있다. 일정한 순도 규정에 따라 양조된 바이에른의 맥주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생산 과정에서 사용되는 홉 열매는 바이에른 자체에서 자란다. 프랑켄 지방의 포도주 역시 감식가들에 의해 높이 평가된다. 오늘날은 이 주의 전체의 생산량의 대략 43%가 생산 산업에서 절반 이상이 서비스 분야에서 유래한다. 레겐스부르크는 중세의 도시 풍경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우그스부르크가 가장 순수한 르네상스의 유물을 간직하고 있다면 화가 뒤러(Durer)의 도시인 뉘른베르크는 교회와 박물관 등에 중세 후반기의 최고 예술품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후작주교가 거주하던 뷔르츠부르크(Wurzburg) 성과 벤츠(Banz) 및 에탈(Ettal) 수도원의 교회 등은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 목록에 기재되어 있는 바로크와 로코코 건축의 최고봉이다. 뮌헨은 독일 최대의 종합대학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의 자연과학 및 기술사 전시관인 독일 박물관을 갖추고 있으며 수많은 역사적 건축물, 유명한 예술 전시관 그리고 극장을 자랑하고 있다. "동화의 왕" 루트비히 2세가 세운 19세기 양식의 성들, 그리고 로텐부르크 오브데어 에어 타우버(Rothenburg ob der dauber) , 뇌르틀링엔(Nordlingen)등의 옛 독일에 남아있는 중세식 전통 목조건축물들은 전세계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음악 애호가들도 바이에른을 즐겨 찾고 있다. 예를 들어 바이러이트(Bayeuth)에서는 매년 예술축제가 열리고 있으며 1872년부터 1883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던 바그너의 오페라가 상연된다.

 

수도 : 뮌헨(Müchen)

독일에서 베를린과 함부르크에 이어 3번째로 큰 도시이다. 알프스 산맥 가장자리에서 북쪽으로 약 48지점에 이자르 강을 끼고 있다.뮌헨(수사의 고향)의 기원은 테게른제에 있던 8세기의 베네딕투스 수도회 수도원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157년 바이에른의 공작 사자공 하인리히가 이 도시를 세우고, 이곳 수사들에게 시장 설립권을 부여했다.

 

1255년 비텔스바흐 가문의 본거지가 되었고, 이후 700년이상 이 가문은 뮌헨의 운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14세기초 '바이에른인'이라고 불린 황제 루트비히 4세는 이 도시를 확장시켰으며, 그 상태는 18세기말까지 지속되었다. 막시밀리안 1(1597-1651) 지배 밑에서 30년전쟁이 있기 전까지 번영을 누렸다. 뮌헨은 뢰벤-브로이 맥주와 맥주축제로 유명하며 히틀러와도 인연이 깊다. 뮌헨은 유럽교통의 요지이며 철도망의 경우 많은 열차들이 뮌헨을 경유한다.

 

 

베를린(Berlin)

 수도 : 베를린

북독일 평원 심장부에 자리잡고 있다. 교역 및 지리상의 동서 중심축 위에 걸쳐 있다는 이점이 베를린이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가 되고 이어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베를린의 옛 영광은 1945년에 끝났으나, 이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파괴를 극복, 재건되었고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양분되면서, 이 도시는 완전히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영토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베를린은 둘로 갈라진 독일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 ()베를린은 동독의 수도로 지정되었고, (西)베를린은 지리적으로 서독 본토로부터 격리된 채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의 주(헌법상 실제 주로 편입된 것은 아님)가 되었다. 이런 특이한 상황은 1961년에 세워진 콘크리트 장벽(베를린 장벽)에 의해 상징, 심화되었고, 40년 이상 베를린을 동서 양 진영의 끊임없는 대치 현장으로 만들었다. 1989년말에 일어난 동독 공산주의 정권의 급작스런 몰락과 그에 따른 베를린 장벽의 개방은 예기치 않게 베를린이 다시 전체 독일의 수도가 될 수 있는 전망을 낳게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베를린은 독일 분단의 상징이자 서방 연합국과 소련 사이에 벌어졌던 냉전의 중심지였다. 1948년 서베를린은 수 개월간에 이르는 소련의 베를린 봉쇄를 공수 물자보급으로 이겨냈다. 영국과 프랑스연합군의 지원 아래 미 공군이 서베를린에 생필품을 조달했던 것이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부 연합군 지역인 서베를린과 소련의 지역인 동베를린이 점차 분리되기 시작하였고 1961813일 동독의 베를린 장벽 설치로 분단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1963년 미국의 대통령 케네디는 쇤베르크 시청 앞에서 행한 유명한 연설에서 "저는 베를린 시민입니다"라며 베를린과 베를린 시민에 대한 연대감을 표현한 바 있다. 베를린의 역대 시장들 가운데에는 에른스트 로우터(E.Router), 월리 브란트(W.Brands), 그리고 리차드 폰 화이췌커(R.v.Weizsalicker)와 같이 베를린뿐만 아니라 전후 독일를 각인했던 유명인사들이 있다. 1987년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브란덴부르크문 근처에서 행한 연설에서 베를린 장벽의 철거를 소련에 요구한 바 있다. 베를린 장벽은 동독의 평화로운 혁명의 결과로 인하여 1989119일에 철거되었다.

 

나치 치하에서의 정신적 문화적 쇠퇴와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베를린은 독일 산업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1920년대에는 유럽문화의 중심지였다. 베를린에는 세 개의 오페라하우스와 다수의 유명한 오케스트라, 수많은 극장과 선도적인 박물관이 있다. 베를린 동부에 있는 대학은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빌헤름 폰 훔볼트(W.v.Humboldt)와 유명한 자연학자이자 여행가였던 알렉산더 폰 훔볼트(A.v.Humboldt) 형제의 이름을 따서 불리고 있다. 서부에는 베를린 자유대학과 공과대학이 있는데 모두 1948년에 설립되었다. 또 한 마이트너 원자물리학연구소, 헤포츠 통신기술 연구소, 그리고 프로이센 문화재단 등 수많은 학술연구기관들이 베를린에 소재해 있다.

 

베를린은 국내와 외국 예술가와 지성인들을 모아 들였다. 테오도르 폰타네,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놀트 츠바이크, 쿠르트 투홀스키, 카를 폰 오시에츠키 등은 대표적인 독일인들이다. 알프레드 되블린은 대도시 소설 "베를린 알렉산더광장"을 썼으며, 1898년 막스 리버만과 발터 라이슈티코프에 의해 만들어진 "베를린 분리파"는 로비스 코린트와 막스 슬레포크트와 같은 화가들을 베를린으로 끌었다. 막스 페히슈타인, 에밀 놀데,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카를 슈미트-로트루프, 프란츠 마르크와 스위스 태생의 폴 클레와 러시아의 바실리 칸딘스키는 베를린에서 작업했고 합동 전시회를 개최했으며, 결정적으로 유럽의 전위 예술에 영향을 끼쳤다.

 

케테 콜비츠와 하인리히 칠레는 이 도시의 어두운 면을 내보였다. "황금의 20"에서는 자기 자신들 일상의 병적인 면이 대 예술의 주제가 되었고, 게오르게 그로체, 죤 허트필드, 막스 벡커만과 오토 딕스에 의해 다양하게 묘사되었다. 극장과 카바레도 마찬가지로 비옥했다.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 한스 샤로운, 브루노 타우트, 에밀 파렌캄프, 한스 포엘치히, 마르틴 바그너는 자기들을 자신들의 혁신적인 건축물들로 두드러졌다. 베를린은 기계제조, 식품 및 주류산업, 제약산업, 섬유산업 특히 전자산업 분야에서 유럽 최대의 산업 중심지이다. 19세기 설립된 지멘스와 아에게는 정보화 산업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통일독일의 베를린은 새로운 통일독일의 수도로 과거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건설과 재건축으로 복잡하다. 모든 과정이 끝나면 독일의 베를린은 유럽 최고의 도시로 탈바꿈할 것으로 보인다.

 

 

슐리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tein)

이 주는 독일에서 유일하게 2개의 바다, 북해와 발틱 해안에 있는 주이다. 고대의 문헌에는 "영원히 하나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적혀 있으며, 따라서 이 지역은 슐리스비히-홀슈타인으로 함께 불리웠다. 오랫동안 독일과 덴마크 사이에 분쟁이 있었던 곳으로 제1차 세계대전 후 북슐레스비히가 덴마크에 귀속되었고 남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은 1946년에 한 주가 되었으며 주도는 킬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다른 주와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동부의 새로운 빙하퇴적물의 구릉지는 비교적 비옥하여 경지가 많으나 서부의 저습지는 거의 목초지이고 대체로 낙농이 활발하다. 중세가지만 해도 풀렌스부르크(Flensburg)는 북해에서 가장 큰 범섬대를 보유하고 인도제도 까지 항로를 지배히기도 하였다. 이 지역은 조선공업으로 발전하였으나 60년대 불황을 만나 조선공업은 크게 후퇴하였다. 1929년 노벨 문학상을 수여한 토마스 만이 태어난 뤼베크가 있는 주이기도 하다.

 

 

수도 : 키일(Kiel)

13세기 전반에 시로 되어 상업을 통해 발달하였으며 1284년 한자동맹에 가입하였다. 그 뒤 덴마크의 영향 아래 있었고, ()의 거주지가 되기도 하였으며, 1665년 대학도 설립되었다. 1773년 덴마크 영토에 편입되었으나, 1864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대 덴마크전쟁의 결과 덴마크로부터 분리되어 66년 프로이센에 통합되었다.

 

전략적 위치와 좋은 항만조건 때문에 해군 근거지로 선정되었고, 71년부터는 독일제국 군항이 되었으며 발트해 경비사령부가 설치되었다. 해군과 관련된 조선, 기계공업의 확대와 95년 노르트오스트제 운하 개통으로 인하여 급속히 발전하였다. 191811월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를 눈앞에 두고 최후의 출격을 계획하였던 해군 지도부에 대하여 평화를 요구하는 해군병사들이 봉기하였고, 병사평의회를 수립하여 독일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당겼던 일로 유명하다. 2차 세계대전중에는 연합군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자를란트(Saarland)

자를란트는 모젤강의 지류인 자르강으로부터 이름을 땄다. 자를란트라는 이름은 1918년까지는 행정, 정치, 역사적으로도 존재하지 않았다. 신성로마제국 기사(騎士)들의 작은 영지로 이루어진 이 지역은, 17세기의 30년전쟁 이후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고, 루이 14세에 의해 한때 점령되었다(1680-97). 프랑스혁명기에는 라인강 왼쪽지역과 함께 프랑스에 합병되었으나, 나폴레옹이 패배한 뒤 맺어진 1815년 파리조약에서 그 대부분이 프로이센에, 남동부는 바이에른에 편입되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 때 나폴레옹 3세는 이곳을 노렸는데, 이는 석탄 등 중요한 지하자원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는 이곳을 병합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고, 베르사유조약에서 국제연합이 감독하는 자치지역으로 되었다가, 35년 주민투표 결과 독일로 복귀하였다. 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는 이곳을 독일로부터 분리해 경제적으로 통합하려 했으나, 54년의 자르지위협정(地位協定)이 이듬해 주민투표에서 부결되자 이를 단념했으며, 5610월 자르조약을 맺어 자를란트는 독일연방공화국에 편입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탄전개발과 제철업이 활발해지자 이 지방은 가난한 농업지대에서 근대공업지대로 바뀌었다. 제철, 제강, 기계 등의 공업은 이 주의 서부 딜링겐에서부터 남부 자르브뤼켄을 거쳐 동부 노인키르헨에 이르는 지대에 집중되어 있다. 과거에는 석탄산업이 활발하여 탄광노동자가 많았으나, 1960년대 에너지혁명 이후 산업구조가 바뀌기 시작하여 3차산업 취업자의 비율이 높아졌다. 프랑스국경 근처에는 비옥한 토양이 있어 농업이 활발한 편이지만, 그 밖의 지역에서는 경작규모가 10ha 이하인 농가가 많다. 곡물재배와 육우, 젖소의 사육이 일반화되어 있다.

 

수도 : 자아브뤼켄(Saarbrücken)

박람회와 심포지움의 도시이다. 이 도시는 독일과 프랑스의 문화가 어울려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종합대학, 전문대학, 예술대학 그리고 음악대학이 집중되어 있어 프랑스학생이 많이 다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튀링겐(Thüringen) 

1990년 독일이 통일되기 직전 재설립 되었으며 에르푸르트, , 게라 주와 라이프치히, 할레 주의 일부로 이루어졌다. 튀링겐의 산림과 그 북쪽에 펼쳐진 튀링겐분지로 이루어졌으며, 게라강, 잘레강, 베라강이 흘러 지나간다. 게르만계 튀링겐족이 나타난 것은 350년경이며, 5세기에 훈족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러나 500년경 튀링겐족은 하르츠 산맥에서 도나우 강에 이르는 거대한 왕국을 건설했다. 이 지역에 튀링겐족(이곳 지명은 이 부족 이름에서 유래)이 정착한 것은 민족이동기에 해당되는 5세기 초였다.

 

 

이 부족왕국은 531년 이르민프리트 왕이 운스트루트 강가의 부르크샤이둥겐에서 프랑크족의 왕 테오도리히 1세와 클로타르 1세에게 패배하여 그들의 영토는 하르츠 산맥과 튀링겐 삼림지역으로 줄어들면서 프랑크족 군주들의 지배를 받았으나 그 뒤 사실상 독립을 되찾았다. 그러나 8세기 초 프랑크의 궁재(宮宰) 칼 마르텔에 의해 다시 정복되었다. 8세기 초에는 성 보니파시우스에 의한 그리스도교화가 추진되어 에르푸르트에 주교좌가 설치되었다. 카를 대제는 잘레강을 슬라브족에 대한 방위선으로, 튀링겐을 변경백령(邊境伯領)으로 정하였으나, 그 뒤 독일인의 동방진출로 이 지역은 완전한 내륙지로 변하였으며, 특히 10세기에 이 지역을 영유하게 된 작센공(리우돌핑가)이 신성로마황제가 되자 황제령의 중핵이 되었다.

 

11세기 무렵 프랑켄지방 출신의 루드빙가가 진출하여, 루트비히수후는 결혼과 매수(買收)로 이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 뒤 마이센 방백(웨팅가)이 튀링겐을 영유하였으며, 또한 1440년 그 영유권이 작센 선제후가(에르네스틴家系)로 넘어가 1815년 프로이센왕국에 합병되었다. 농업지대로서 에르푸르트의 화훼원, 채소원예, 채종업(採種業)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중앙을 동, 서로 꿰뚫은 철도간선을 따라 서쪽으로 아이제나흐, 고타, 에르푸르트, 바이마르의 도시가 이어져 있고, 그곳에 전기기기, 기계, 차량공업이 발달하였다. 그 밖에 줄의 칼리(kali)공업, 예나에 있는 광학기계제조회사, 차이츠의 쌍안경, 현미경, 천체망원경 등이 유명하다. 튀링겐은 광대한 산림지역으로 '독일의 녹색 심장'이라고 불린다.

 

수도 : 에르푸르트(Erfurt)

옛 독일의 정신적 중심지로 '튀링겐의 로마'라는 별칭도 있다. 724년 처음 에르페스푸르트로 기록되었는데, 이 이름은 게라(원명 에르프) 강의 여울(푸르트)에 수도원과 왕의 저택이 서 있던 데서 유래했다. 742년 성 보니파티우스가 이곳에 주교관구를 세웠다. 805년경에는 프랑크 제국의 동쪽 경계선에 접한 군사 요충지이자 행정, 상업 중심지였다. 1250년경 마인츠의 대주교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았으며, 중세시대에는 광활한 여러 지역을 관장했다.

 

15세기에 한자 동맹에 가입했으며, 1600년까지 청색 물감을 추출하는 데 쓰던 대청을 상당량 취급한 상업 중심지였다. 1392년에 개교한 대학교는 1816년 탄압을 받았다. 30년전쟁(1618-48) 때 스웨덴의 주둔군이 점령했으며, 1664년에는 마인츠 선거후의 영토가 되었다. 1802년 프로이센으로 넘어간 뒤, 프랑스가 점령했던 시기(1806-13)를 제외하고는 1945년까지 프로이센 작센의 일부가 되었다.

 

1808년 나폴레옹과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가 바이에른, 작센, 베스트팔렌, 뷔르템베르크 등의 여러 왕들과 함께 에르푸르트 의회 의사당에서 회의를 가졌으며, 1850년 잠시 시행된 프로이센 동맹 회담도 이곳에서 열렸다. 토양이 비옥하고 지하수위가 높기 때문에 화초의 씨나 묘목의 생산이 번성하며 국제원예박람회(IGA)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옛날에는 대학이 있었으나 1816년에 폐쇄되었고, 2차 세계대전 후에 교육대학과 의과대학이 창설되어 도시 북서부에 새로운 대학지구가 생겼다. 북부에는 정밀기계, 전기기술, 중기계, 제화, 의류공장이 모여 있다.

 

 

헤센(Hessen)

역사적으로 헤센주의 모체는 옛 독일의 연방국가였던 헤센카셀과 헤센다름슈타트이다. 13세기 중엽에 하인리히 1세가 튀링겐 방백령에서 독립하여 헤센 방백이 되었다. 개신교파 제후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던 필리프 1세가 죽은 후 영토가 분할 상속되어 헤센카셀과 헤센다름슈타트로서 지속되었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한때 베스트팔렌 왕국에 합병되었지만 베스트팔렌 왕국이 몰락하면서 다시 독립을 찾았다. 그 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가 헤센카셀은 프로이센에 의해 합병되고, 헤센다름슈타트는 영토의 일부를 프로이센에 할양하였고, 1870년 독일 제국의 구성국이 되었다가, 2차 세계대전 후에 헤센주에 편입되었다.

 

 

주민의 2/3가 그리스도교에서, 종교개혁의 결과 생겨난 프로테스탄트를 믿는 신도들이고, 1/3은 정통 교의를 믿는 가톨릭교도이다. 헤센이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은 1945년부터 였다. 그 이전에 이지역은 수백년 동안 작은 공국(公國)으로 분할 되어 있었다. 16세기에 들어와서야 필립 백작이 정치개혁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되면서 헤센은 독일의 중심지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헤센의 중심 도시인 프랑크푸르트는 오랫동안 자유 제국도시였으며 독일 황제들의 제위식이 열렸던 곳이다. 1848년과 1849년에는 독일 최초의 민주의회인 국회가 소지되었던 곳이 프랑크푸르트이다.

 

헤센은 금융중심 도시인 프랑크푸르트로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세계적인 박람회 개최지역으로 유명하다. 프랑크푸르트 모터쇼는 세계3대 모터쇼이다. 또한 유럽 최대의 화물공항 이며 유럽에서 2번재로 거대한 공항이 프랑크푸르트에 있다. 또한 대부분의 독일은행과 외국은행의 지점이 있는 곳이 프랑크푸르트이다. 한국의 한국은행격인 연방은행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헤센은 라인강은 베를린과 함께 루르지역에 이어 독일에서 두번째로 큰 경제중심 지역이다. 이곳에 훼스트, 오펠 등의 기업이 있다.

 

기계제조, 기관차 및 객차제조, 자동차산업이 카셀(Kassel)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있다. 카셀에는 세계최대의 현대 예술박물관인 "도쿠멘타"가 있어 예술가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가죽산업으로 유명한 오펜바흐(Offenbach)가 있고 다룸타트(Darmstadt)는 광과대학으로 유명하다. 대학도시인 마르부르크(Marburg)와 기센(Gießen) 그리고 광학 산업으로 유명한 도시인 웨츨라(Wetzlar)는 아름다운 자연을 가지고 있다. 베르크스트라세(Bergstraße)와 라인가우(Rheingau)는 독일 최대의 과일과 포도 경작지 가운데 하나이다.

 

 비스바덴(Wiesbaden)

행정의 중심지역이며 카지노와 온천을 갖춘 휴양지이다. 로마 시대에 광천지(아쿠아에마티아카에)로 알려졌다. BC 12년에 흙으로 쌓아 만든 이곳의 요새들은 AD 83년에 다시 돌로 쌓았으며, 370년경에는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는 로마의 성벽이 건립되었다. 프랑켄 궁전 소재지로서 이곳의 지명 비지바다('초원의 온천'이라는 뜻)829년의 문헌에 나타난다. 이곳은 1241년 제국도시가 되었다가 1255년 나사우 백작가에 넘어갔으며, 1744년 나사우징겐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1806-66년 나사우 공작령의 수도였다가 프로이센에 넘어갔으며, 그후 헤센나사우 주 비스바덴 구의 구청소재지가 되었다. 1946년 비스바덴은 신설된 헤센 주의 주도가 되었으며 과거 마인츠의 교외 지구들이었던 라인 강 우안의 카스텔, 아뫼네부르크, 코스트하임을 합병했다. 27개의 뜨거운 염류천이 있고 타우누스 산맥이 북풍을 막아주기 때문에 기후가 온화한 것으로 유명하며 특히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는 여러 나라의 왕족들과 더불어 괴테, 막스 레거, 브람스, 도스토예프스키 등이 빈번히 찾아옴으로써 특히 유명해졌다. 넓은 정원 같은 배경과 위락시설로 인해 인기있는 휴양지겸 회의 개최지가 되어왔다. 매년 5월에는 국제 음악, 발레,연극 축제가 개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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