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일반 현황
1. 언어 : 독일어, Deutschland, 도이칠란트, 문화어: 도이췰란드
2. 정식 명칭은 독일 연방 공화국(獨逸聯邦共和國), 유럽에 위치해 있는 나라
3. 수도 : 베를린
4. 지역적 특징 → 북쪽 : 덴마크와 북해, 발트 해, 동쪽으로 폴란드와 체코, 남쪽 :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서쪽으로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5. 영토 : 357,021 제곱킬로미터
6. 기후 : 주로 온대 기후
7. 인구 : 2010년 1월 기준으로 8,180만여 명 이상으로 유럽 연합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 이민자 인구가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다.
8. 공용어 : 독일어, 소수 민족어나 러시아어, 영어, 소르브어, 덴마크어, 프리지아어도 쓰인다.
고대 여러 게르만족이 살던 독일 땅은 게르마니아로 알려져 있었으며, 100년 이전에 관련 기록이 남아있다. 10세기부터 게르만족의 땅은 1806년까지 존속한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부였고, 16세기 북 독일은 루터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된 종교 개혁(Reformation)의 핵심부로 자리잡았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에 독일은 최초로 통일을 이루어 근대적인 국민 국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9년에 독일은 연합군 점령지 경계선을 따라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 되었으나, 1990년에 재통일되었다. 연방제와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공화국으로 16개 주로 이루어져 있다. 수도는 국내 최대 도시인 베를린이다. 국제 연합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 G8, G20, 경제 협력 개발 기구, 세계 무역 기구, 유럽 연합의 회원국. 명목(名木) 국내총생산 기준으로 세계 4위의 경제 대국이다.
그 밖에,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는 세계 5위, 수출과 수입 규모는 세계 2위, 연간 개발 원조액은 세계 2위, 군비 지출액은 6위를 보인다. 생활 수준이 높으며 광범위한 사회 보장 제도를 이룬 나라. 여러 과학 기술 분야에서도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
독일은 어떤 나라인가?
게르만족은 북유럽 청동기 시대이나 가장 늦게 잡아 로마 이전 청동기 시대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1. 기원전 1세기
게르만족은 남부 스칸디나비아와 북 독일에서 남쪽, 동쪽, 서쪽으로 진출하여 동유럽의 이란인, 발트족, 슬라브족을 비롯하여 갈리아의 켈트족과 만나게 되었다. 게르만족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이들과 접촉한 로마 제국에서는 관련 기록이 남아 있고 어원론이나 고고학상의 발굴을 통해서도 관련된 자료들이 있다. 타키투스가 《게르마니아》를 쓴 서기 100년경에 게르만족은 라인 강에서 도나우 강에 이르는 선(리메스 게르마니쿠스)를 따라 모여 살았는데, 이들이 살던 땅은 오늘날의 독일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남부 바이에른, 서부 라인란트 지방에서는 로마 속주가 설치 3세기에는 알라마니족, 프랑크족, 카티족, 작센족, 프리지아족, 시캄브리족, 투링기족 등 규모가 큰 서부 게르만 부족이 나타났다. 260년경에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 국경(리메스)와 도나우 강 국경선을 넘어 로마 영내로 들어왔다.
2. 신성 로마 제국 (962년 ~ 1806년)
영역 800년 12월 25일에 샤를마뉴는 카롤링거 제국을 세웠으나, 843년의 베르됭 조약으로 나라는 세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그 가운데 한 부분인 동프랑크 왕국이 962년에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져 1806년까지 존속하였으며, 영토는 북쪽의 아이더 강에서 남쪽의 지중해 해안에 이르렀다.
3. 오토 왕가의 치세(919년 ~ 1024년)
로타링기아 공국, 작센 공국, 프랑켄 공국, 슈바벤 공국, 튀링엔 공국, 바이에른 공국이 합방하였으며, 962년에 독일 왕이 이들 지역을 지배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4. 잘리어 왕가 치세(1024년 ~ 1125년)
신성 로마 제국은 북부 이탈리아와 부르고뉴 지방을 흡수하였으나, 서임권 분쟁으로 말미암아 잘리어 왕가의 황제들은 권력을 잃었다.
5. 호엔슈타우펜 왕가 치세(1138년 ~ 1254년)
독일의 제후들은 슬라브족이 사는 남쪽과 동쪽 지방으로 영향력을 넓혔는데, 전부터 이들 지방과 동방 식민지(오스트지들룽)에는 독일의 정착지가 있었다. 북독일의 도시들은 한자 동맹의 일원이 되어 번영하였다. 1315년의 대기근이 일어나고 뒤이어 1348년 ~ 1350년 사이에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독일의 인구는 급감하였다.
6. 1356년에 나온 금인칙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할 때까지 제국의 기본 헌법이 되었다. 금인칙서에서는 강력한 공국이나 주교령을 다스리는 선거 후 일곱 사람이 황제를 선출하도록 규정하였다. 15세기부터 제국에서 선출된 황제 제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독차지 하다시피 하였다.
7. 마르틴 루터
1517년에 로마 가톨릭사제였던 마르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출간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과 관습에 대항하여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 하지만 농민들이 제후들의 착취에 대항하여 일으킨 독일 농민 혁명 당시 제후들과 결탁하여 농민학살을 지지했고, 자유에 대해서도 정신적 자유에 한정짓는 한계가 있었다. 이는 에른스트 블로흐가 혁명의 신학자라고 칭찬할만큼 기독교 신앙의 실천을 중요하게 여긴 종교개혁자였던 토마스 뮌처가 천년왕국의 도래라는 비전을 가지고 농민혁명을 주도한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렇게 떨어져 나온 루터교회는 1530년 이후 독일내 여러 나라들의 공식적 교회가 되었다.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종교 분쟁으로 30년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독일은 황폐화되었다. 독일에 있던 나라들의 인구는 30% 정도 줄어들었다.
이후에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독일의 종교 전쟁은 종식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수많은 독립 공국으로 갈라졌다. 1740년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로이센 왕국간의 대립이 독일 역사의 주요 양상으로 나타난다. 1806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하였다.
8.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
1814년에 빈 회의가 소집되었으며, 39개 주권국의 느슨한 연맹체인 독일 연방이 성립되었다. 왕정 복고를 놓고 이견이 나타나면서, 통합과 자유를 요구하는 자유주의 운동이 발흥하는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메테르니히는 이러한 자유주의 운동을 탄압하였다.
9. 독일 관세 동맹(Zollverein)
독일 내 여러 나라들의 경제 통합을 크게 진전시켰다. 이 시기에 여러 독일인들은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경도되었으며 민족주의가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당초 검은색, 붉은색, 황금색은 독일 민족주의 운동의 상징이었으나, 나중에 독일 국기의 색이 된다.
1848년 3월 19일, 베를린에서 일어난 혁명 봉기유럽의 1848년 혁명으로 프랑스에서 공화정이 성립하자, 독일의 지식인들과 평민들도 혁명을 일으켰다. 처음에 군주들은 혁명주의자들의 자유주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임금은 황제 칭호를 받았으나 권력을 잃자 왕위를 거부 헌법을 제안 일시적으로 혁명 운동에 제동을 걸었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 임금과 자유주의 세력이 강해진 의회는 1862년에 군제 개혁을 놓고 갈등하였다. 임금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프로이센의 총리로 임명하였다. 비스마르크는 1864년에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덴마크를 무찔렀다. 이후 1866년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하여 비스마르크는 북독일 연방을 창설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과거 독일의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여타 독일 국가들의 내정에 간섭하지 못하게 되었다.
10. 독일 제국 (1871년 ~ 1918년)
1871년에 독일 제국이 최초로 독일의 통일을 이룬 근대 국가가 되었는데, 이 가운데 프로이센 왕국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무찌르면서 1871년 1월 18일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건국이 선포 프로이센의 호엔촐러른 왕가가 새 제국을 다스렸으며, 수도는 베를린이었다. 독일 제국은 오스트리아 외의 독일의 모든 지방을 통일하였다. (소독일주의) 1884년부터 독일은 유럽 바깥 지역에 식민지를 확보하기 시작.
11. 독일의 통일 이후
그륀더자이트 시대(창설 시대)에 독일 제국은 수상 비스마르크의 지도로 타 열강들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중 삼중의 비밀 외교로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독일은 영국, 프랑스 등과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해외 식민지 쟁탈 경쟁에도 뛰어들지 않았다. 대신 독일은 "식민지 대신 화학을"이라는 슬로건처럼 뒤늦게 산업 혁명을 추진하여 산업 국가로 거듭났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독일은 내부 모순 및 문제에 직면. 이 내부 문제는 노동조합과 독일 사회민주당을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의 활발한 운동으로 표면화하기 시작하였다.
뒤이어 황제로 등극한 빌헬름 2세는 유럽의 다른 열강처럼 제국주의 정책을 내세워 이웃 나라들과 마찰을 빚었다. 이 때문에 이전에 독일이 맺고 있던 대부분의 동맹이 갱신되지 않았으며, 새로운 동맹에서는 독일이 빠졌다. 특히 프랑스는 영국과 영국-프랑스 협상(Entente Cordiale)을 맺고 러시아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확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관계를 맺은 것 외에 독일은 점차 고립되었다.
독일은 자국 영내를 벗어나 유럽 열강들이 벌이고 있던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베를린 회의에서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를 나눠가지기로 합의. 독일은 독일령 동아프리카, 독일령 남서부 아프리카, 토골란트(토고), 카메룬을 비롯한 아프리카의 여러 영토를 확보. 아프리카 쟁탈전으로 열강 사이에 긴장 상황이 벌어졌으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데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1914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살해당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동맹국 측에 섰던 독일은 역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손꼽히는 이 전쟁에서 연합국에 패배. 전쟁 중 독일군 전사자는 2백만 명에 이른다. 1918년 11월에 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빌헬름 2세와 독일의 모든 제후가 폐위. 그 해 11월 11일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전쟁이 끝났으며, 1919년 6월에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전통적인 전후 외교 방식과 달리 당시 협상에서는 패전국인 동맹국이 배제. 독일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이 다른 수단을 통한 치욕스러운 전쟁의 연속으로 여겨졌으며, 조약에서 규정한 가혹한 조건 때문에 이후 나치즘이 발흥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12. 바이마르 공화국 (1919년 ~ 1933년)
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은 공화국으로 선포되고 왕정이 무너졌다. 그러나 권력 투쟁은 이어졌는데 급진 좌파 공산주의자들이 바이에른에서 권력을 잡았지만, 독일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13. 독일 혁명
1919년 8월에 바이마르 공화국이 공식 출범하면서 끝을 맺는다. 1919년 8월 11일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이 바이마르 헌법에 서명하면서 헌법이 발효되었다. 그리고,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은 가혹한 화의 조건을 강요 받은데다 마침 대공황까지 닥쳤, 불안정한 정부들이 세워지고 무너지기를 거듭 독일 사람들은 점차 의회 민주주의 정치 체체와 주류 정당들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우익 세력(왕당파, 민족주의자, 나치)들은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까닭은 정부 전복을 원하는 자들 때문이라는 소위 등 뒤의 칼 이야기(Dolchstoßlegende)를 퍼뜨리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바이마르 정부의 수뇌부는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독일 민족을 배신하였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스파르타쿠스단과 같은 급진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평의회 공산주의(Räterepublik)를 지지하며 "자본주의 지배"를 철폐하기 위한 혁명을 원하였다.
새 바이마르 정부에 대한 불만 때문에 독일 공산당이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여러 보수주의자들은 반동적이거나 혁명적인 우익으로 쏠렸는데, 그 가운데는 독일 민족사회주의 노동자당(나치)이 있었다. 1932년에 공산당과 나치가 의회 다수(1932년 7월 기준으로 총 296석)를 차지하였다. 여러 내각이 실패를 거듭한 끝에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별다른 대안이 없음을 알고 우익 고문들의 압박으로 1933년 1월 30일에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의 총리로 임명한다는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14. 제3제국 (1933년 ~ 1945년)
1933년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이 불길에 휩싸였으며 뒤를 이은 비상 법령으로 시민 기본권이 폐지되었다. 의회에서 수권법이 통과되면서 히틀러는 무제한적인 입법권을 부여 받았다. 이때 사회민주당만이 반대표를 던졌는데, 독일 공산당 의원들은 이미 투옥된 상황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권력으로 모든 반대 세력을 무너뜨리고 몇 달도 안되어 중앙집권적인 전체주의 국가를 세웠다. 군사 재무장에 역점을 두어 산업이 회생하였다. 베르사유 조약 당시 독일은 자르와 라인란트를 잃었는데, 1935년에 독일은 국제 연맹이 관리하던 자르 지방을 되찾았으며 1936년에는 라인란트를 군대로 장악하였다.
군사 재무장과 더불어 독일의 외교 정책은 더욱 공격적이고 확장적인 방향을 취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1938년과 1939년에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각각 점령하였으며, 폴란드 침공을 준비하였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 사건) 1939년 9월 1일, 독일 국방군은 폴란드에 전격전을 개시하여 폴란드는 순식간에 독일과 소련의 붉은 군대에 점령당하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독일과 여타 추축국은 유럽 대륙의 상당 지역을 장악하였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였다. 같은 해에 일본이 진주만의 미군 기지를 기습하였으며, 일본과 동맹을 맺은 독일은 미국에 선전포고하였다. 독일 군대는 소련 영내로 신속히 진군하였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황이 뒤집혔다. 이후 독일군은 동부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1943년 9월에 독일의 동맹국인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독일군이 이탈리아를 점령하면서 독일은 새로운 전선을 감당해야 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역시 서부 전선을 열면서 2차 대전의 전환점이 되었는데, 독일은 얼마 안되어 패배하였다. 1945년 5월 8일, 붉은 군대가 베를린을 점령한 뒤 독일군이 항복하였다. 이 전쟁에서 독일인 군인 및 민간인(중앙유럽의 독일계 인구도 포함하여) 7백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독일 제3제국은 나중에 '홀로코스트'라고 불린 대학살을 통하여 수많은 반대 세력과 소수 집단을 직접 탄압하기 위한 정책을 실행하였다. 홀로코스트로 1,700만 명이 살해당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유대인 600만 명, 집시와 폴란드인, 소련의 전쟁 포로를 비롯한 러시아인,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적 반대 세력 상당수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나치의 학살로 유럽에서 죽은 사람의 수가 4천여 만 명이 넘는다. 전후 나치의 전쟁 범죄를 심판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다.
15. 1945년의 분할 점령된 독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수많은 독일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독일은 오더-나이세 선 동쪽 영토를 잃고 옛 동부 영토와 다른 지역에서 독일인 1,500만 명이 추방되었으며, 독일 여성 2백만 여 명 이상이 강간당하고, 여러 주요 도시가 파괴되었다. 남은 영토와 베를린은 연합국이 4개 군사 점령 지구로 분할.
1949년 5월 23일에 독일 영토 가운데 프랑스, 영국, 미국이 통제하는 서방측 지구가 통합하여 독일 연방 공화국이 들어섰으며, 같은 해 10월 7일에 소련측 지구는 독일 민주 공화국이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주로 두 나라를 각각 '서독'과 '동독'으로 칭하였으며, 베를린 역시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갈라졌다. 동독은 동베를린을 수도로 삼았으며, 서독의 경우는 본이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서독은 두 나라로 갈라진 당시 상태가 언젠가는 종식되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으므로 수도 본의 지위를 임시적인 것으로 규정.
1) 서독
"사회 시장 경제" 체제와 더불어 연방제 의회 공화국 체제를 수립하였으며, 미국,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1950년대 초부터 서독은 장기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1955년에 서독은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하였으며, 1957년에는 유럽 경제 공동체에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2) 동독
동구권에 속한 나라로 바르샤바 조약과 붉은 군대 점령군을 통하여 소련의 정치/군사적 통제를 받았다.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하긴 하였으나 권력은 공산주의 세력인 독일 통일사회당(SED)의 정치국원들이 독점하였다. 이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거대한 비밀 정보 기관인 슈타지와 그 밖의 여러 통일사회당 하부 조직을 통해 사회 전반을 통제하였고 그 대신 국가는 싼 값에 대중의 기초 생활 필수 재화를 제공하였다.
소련식 통제 경제 체제를 세웠으나 나중에는 경제상호원조회의(코메콘)에 가입하였으며, 동독에서는 주로 동독의 사회 보장 제도의 이익과 더불어 서독이 언제든 침공할지 모른다는 내용을 선전하였으나, 동독 시민 다수는 서방의 정치 자유와 경제 번영을 부러워하였다. 동독인이 서독으로 월경하지 못하게끔 막고자 1961년에 건설한 베를린 장벽은 냉전의 상징이 되었다.
1970년대 초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방 정책을 추진. 동서독간의 대립이 어느 정도 완화되었는데, 이 정책에는 독일이 2차 대전에서 영토를 잃은 사실을 사실상 인정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1974년 FIFA 월드컵에서 서독과 동독이 동반 진출한 바도 있었다.
16. 통일 베를린
헝가리가 철의 장막을 해체하기로 결정하고 8월 23일에 국경을 개방하자 9월 11일에 동독인 수천 명이 헝가리 국경을 통해 서독으로 탈출하였다. 이 사건이 동독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으며, 동독 당국은 11월에 뜻밖에도 국경 제한을 해제하여 동독 시민들이 서방을 다녀갔다. 당초 동독은 자신이 국가로서 계속 존속할 수 있게끔 통제 정도만 조절하기 위한 의도로 국경 개방 조치를 단행, 이 일로 말미암아 동독에서 벤데 개혁이 가속화되었으나 결국 1년 뒤인 1990년 9월 12일에 2+4 조약으로 귀결되어 전후 당시 독일을 점령하던 4개국은 항복 문서에 따른 자신들의 권리를 폐기하고 독일에 완전한 주권을 돌려주었다.
1990년 10월 3일에 독일은 재통일을 이루었으며, 옛 동독에서 새로이 편성된 다섯 주가 독일 연방 공화국에 귀속.
17. 베를린 공화국과 유럽 연합 통합 (1990년 ~ )
1994년 3월 10일에 의회에서 가결한 본-베를린 법에 의거하여 베를린은 통일 독일의 수도로 지정, 본은 연방 도시(Bundesstadt)라는 특수한 지위를 부여받고 일부 연방 부서가 이 곳에 남았다. 정부 기관 재배치는 1999년에 완료하였다. 그러나 통일 이후 고물가, 실업 증가, 자본주의 환경으로 인하여 옛 동독 사람들의 부적응과 같은 여러 문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18. 재통일 이후
독일은 유럽 연합과 북대서양 조약기구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 독일은 발칸 반도에 평화 유지군을 파병,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일원으로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년 ~ 현재)에도 참전. 이러한 파병을 놓고 논란이 일어났는데 전후 독일은 국내법에 따라 국방 기능을 위해서만 군대를 운용할 수 있도록 규정되었기 때문. 그러나 해외 파병은 이러한 국방 제한 규정에 저촉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이 사안에 관하여 의회에서는 표결을 통해 평화 유지를 위한 참전을 합법화하였다.
독일의 근·현대 문학
1.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의 고전주의, 낭만주의
2. 19세기의 청년독일파와 사실주의
3. 20세기 초반은 현질주의에 대한 반작용
4. 20세기 후반 전후문학은 실존주의
독일의 대표적인 건축물
1. 하이델베르크성
하이델베르크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고딕 양식으로 지어 졌지만 16세기에 개조되어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로 손꼽힌다.
2. 브란덴부르크 문
베를린의 상징으로 한때 서 베를린과 동 베를린의 경계선 이었다. 위에는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승리의 여신인 빅토리가 조각되어 있다.
3. 쾰른 대성당
10세기 후반에 성립된 오토 제국시대에서 비롯되는 건축이다. 독일 쾰른. 중세기 독일 최대의 성당으로 가장 유명한 프랑스 고딕 양식에 속하는 쾰른시를 대표하는 건조물이다. 고딕 양식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내부에 많이 있다.
4. 상수시 궁
독일 포츠담. 상수시 공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1747년에 개관한 로코코 양식의 궁전으로 궁전 앞의 포도밭길 정원이 장관이다.
5. 츠빙거 궁
포스트 광장에 있는 작센 바로크 건축의 대표적인 궁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으나 전후에 재건되었다. 건물은 크로넨문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균형미를 살렸으며, 십자형의 넓은 뜰에는 바로크 양식으로 조각된 분수가 있는 연못이 있다. 특히 '요정의 샘'이 유명하며, 광장에서는 매년 여름 드레스덴 음악제가 열린다. 궁전 건물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독일의 성 문화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와 달리 개방적인 성 문화
독일은 10대의 임신이 줄어드는 나라
독일의 음식 문화
빵과 소세지와 햄, 감자나 거친 호밀빵과 맥주가 떠오르는데, 독일인들의 아침은 주로 빵과 커피를 마시고 점심은 간단하게 그리고 저녁은 푸짐하게 먹는 편이다. 아침에 많이 먹는 빵으로는 주먹만한 브뢰첸(Broechen)이 있는데, 프랑스의 바게트처럼 겉은 딱딱하지만, 밀가루, 효모와 물 이외에는 다른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는다.
좀더 많은 내용은 아래 링크 참조
독일의 전통 축제
지방마다 자신만의 축제가 있으며, 마인츠의 포도주축제, 뮌헨의 맥주축제와 같이 지역과 특산물에 따라 많은 축제가 있으며, 그중 대표적인 축제로는 뮌헨의 축제가 있습니다. 맥주는 1516년 바이에른 왕국 빌헬름 4세 때 발표된 맥주 원료 순수령(세계 최초의 식품 위생법)으로 그 품질이 계속 유지되었으며 국민적 음료로 사랑받아왔으며 사육제·부활절 축제 ·종교 행사 등에도 빠질 수 없는 필수품이 되었다
독일을 상징하는 꽃과 나무
1. 센토레아
독일의 국화는 센토레아(Centaurea, Corn flower, 수레국화)이다. 한해살이 꽃으로 5월 유럽의 보리밭 주변에서 볼 수 있으며, 유럽에 널리 분포하며 꽃의 이름이 가진 의미 때문에 '황제의 꽃'이라는 별칭이 있다. 꽃의 색은 청색, 백색, 분홍색, 적색 등이 있다. 꽃말은 행복이다.
2. 보리수
보리수는 독일의 국민수이다. 마을의 광장이나 성스러운 장소 등에 많이 심어져 있다.
독일의 전통의상
알프스산맥에 거주하는 남자 들이 주로 입는 옷을 레더호젠(Lederhosen)이라고 한다. 바지로서 질긴 가죽장화를 함께 신는다. 레더호젠(Lederhosen)은 독일은 물론 스위스, 오스트라아의 독일인들이 입는 전통의상이나 독일의 전통의상은 알프스를 중심으로 지역별로 차이를 나타낸다. 대표적인 지역으로는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 티롤(Tirol), 보덴제(Bodensee), 바이에른(Bayern), 알가우(Allgäu)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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