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의 역사적 기원
화학은 물질과 그 변화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우리의 몸은 화학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일어나는 화학반응에 의해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과 주위의 모든 것이 다 화학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화학을 이용하는 활동은 인류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불의 사용과 금속의 제련과 같은 기술은 고대 인류의 생활과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화학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술적인 발달 외에 그리스 철학자들의 만물의 근원에 대한 철학적인 사고활동 역시 화학의 뿌리를 이룬다. 예를 들어 데모크리토스 (Demokritos, BC460-370경)는 흙, 공기, 물 ,불을 구성하는 네 가지 원자(atom)의 존재를 제안함으로써 원자론의 뿌리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실험적 형태의 화학은 연금술(alchemy)로부터 시작되었다.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로 세계의 많은 학자와 사상가들이 모여들면서 그리스 철학과 동방의 신비주의 그리고 이집트의 기술이 결합되어 연금술로 발전하였다. 물론 돌을 금으로 바꾼다는 것은 그야말로 허황된 꿈이었지만 연금술사들은 그 과정에서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다양한 방법들을 발견했고, 많은 화학 기구들을 고안하였다.
연금술이 화학에 끼친 영향을 포도밭에 금을 묻어 두었다고 유언을 남긴 어느 농부의 이야기로 비유할 수 있다. 농부의 아들들이 금을 찾기 위해 포도밭을 파헤친 결과 금 대신 풍성한 수확을 얻은 것처럼 연금술을 통해 금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새로운 발명과 과학의 진보가 가능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교훈을 찾는다면 실험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것이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페니실린을 발견한 플레밍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실패를 통해 더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는 실패하지 않았으면 결코 얻을 수 없었을 많은 경험을 축적하게 된다. 그래서 훌륭한 과학자라면 실패한 실험이라도 항상 실험노트에 자세히 기록해 놓는 습관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1691)은 최후의 연금술사이자 최초의 화학자라고 할 수 있다. 보일은 모든 이론은 실험으로 검증되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보일은 물질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으며, 실험을 통해 물, 흙, 불, 공기는 원소가 아님을 증명했다. 특히 1661년에 출판된 ‘회의적인 화학자 (The Sceptical Chymist)’라는 그의 책에서 보일은 화학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물질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정의함으로써 연금술과의 결별을 선언하였다.
화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두 사람을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화학의 혁명자라고 불리는 라부아지에 (Antoine Lausent Lavoisier, 1743-1794)는 연소는 연료가 공기 중의 산소와 화합하는 현상임을 입증하여 오랜 기간 동안 진실로 받아들여져 왔던 고전적 연소 이론인 플로지스톤설을 과학적 방법으로 타파하였고, 화학 반응에서 반응 전후의 질량의 총합은 서로 같다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실험을 통해 증명함으로써 화학 반응을 정량적으로 다루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또 한 사람 멘델레예프 (Dmitrii Ivanovich Mendeleev, 1834-1907)는 원소들의 주기적인 성질을 파악하고 주기율표를 고안함으로써 화학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주기율표는 원소들의 특성을 예측하고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이후에 주기율표의 주기성이 바로 전자배치의 주기성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그 중요성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화학의 분야들
화학은 모든 물질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그 범위가 매우 넓고 다른 자연과학 및 응용과학 분야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림 1). 화학의 분야를 크게 나눈다면 대상이 되는 물질에 따라 유기화학, 무기화학, 생화학으로 나눌 수 있고 여기에 연구의 성격에 따라 물리화학과 분석화학이 추가된다. 유기화학은 탄소를 포함하는 화합물들을 다루는 분야이다.
생물체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물질들이 탄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유기화학은 의학, 약학, 농수축산학, 식품학 등 여러 분야의 기초가 된다. 무기화학은 유기화합물이 아닌 물질 즉 탄소를 포함하지 않는 물질을 대상으로 한다. 최근에는 나노기술을 비롯한 신소재에 대한 연구로 관심을 끌고 있다. 생화학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생물체에 있는 물질들의 특성과 기능을 연구하고 또 생명현상을 화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연구하는 분야이다. 생화학은 화학의 한 분야로 취급되기도 하지만 화학과 생물과학의 중간에 위치하여 때로는 자연과학의 독립된 한 분야로 여겨지기도 한다. 생화학에 뿌리를 둔 생명공학은 첨단 분야로서 최근에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물리화학은 다루는 물질이 아니라 연구의 성격에 따라 만들어진 분야이다. 물리화학에서는 수학적 기초와 물리학의 방법들을 동원하여 물질의 특성이나 화학반응의 특성 자체를 연구한다. 예를 들어 물은 왜 분자량이 비슷한 다른 물질에 비해 끓는점이 높은지 왜 온도를 높여주면 반응속도가 빨라지는지와 같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노력한다. 분석화학은 물질의 성분을 확인하거나 양을 측정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때로는 새로운 분석방법의 개발로 인하여 학문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전기를 맞이하기도 한다. 최근에 일본의 다나카 고이치는 질량분석기를 생물고분자에 응용하여 고속으로 분석할 수 있게 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대표적인 분야들이고 이외에도 유기금속화학, 생무기화학, 생유기화학, 물리유기화학, 생물리화학, 분석생화학, 초분자화학 등 많은 경계 분야 또는 특수 분야들이 존재한다.
최근에는 정보의 양이 크게 증가하면서 각 학문분야가 고립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옛날에는 한 사람이 철학, 과학, 의학, 공학 등의 몇 분야를 동시에 연구하여 업적을 남기는 경우도 있었지만 요즘은 전문성이 강화되어 한 분야의 연구자가 다른 분야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는 것이 무척 어려워진 것이다. 그러나 한 분야의 발견이 다른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화학 전공자도 다른 분야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갖는 것이 유리하다.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한 가지 목표를 위해 협력하여 연구하는 것을 학제간 연구 (interdisciplinary study)라고 하는데 한 예를 들면 바이오센서의 연구에는 화학, 생화학, 생물학, 금속공학, 컴퓨터과학 분야의 연구자들이 필요하다. 또한 최근에는 컴퓨터를 사용하여 그동안 축적된 방대한 데이터로부터 유용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한 생물정보학 (bioinformatics)이나 화학정보학 (cheminformatics)이 새로운 분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러한 학제간 연구에서는 각 분야에 축적된 지식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혁신적인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화학은 단기적이고 실용적인 응용목표를 설정하지 않고 자연을 이해하기 위한 지식을 추구하는 기초과학 (basic science)에 속한다. 생화학자들이 세포 내에서 DNA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 연구할 때 그 연구결과가 어떻게 응용될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생명의 신비를 밝혀내기 위한 호기심과 과학적인 공명심이 주된 동기였을 것이다. 응용과학 (applied science)에서는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명한 단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연구를 수행한다. 예를 들어 오존층을 파괴하지 않는 새로운 냉매를 개발하기 위한 연구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그러나 DNA의 역할에 대한 연구가 현대 생명공학의 기초가 된 것처럼 기초과학의 발전이 없이는 응용과학이 불가능하다. 또한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궁극적인 응용을 염두에 두고 기초과학 연구를 수행하기 때문에 두 분야가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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